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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침략 전쟁에 대한 민족의 대응

by ㎣㎤㎥㎦ 2022.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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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중, 일 전쟁을 추진하면서 전시 동원 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약간이라도 민족적 색채를 띤 활동이나 단체를 모조리 탄압하였습니다. 수양 동우회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수양 동우회는 인격 수양과 민족 실력 배양을 표방하며 1920년대 초부터 계몽 운동을 하였는데, 일제는 그것조차도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일제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굴종과 전쟁에 대한 협력을 요구하였고, 강요를 이기지 못한 이들은 이에 따랐습니다. 만주 사변 이후 일제가 침략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며 이를 크게 선전하자 한국인의 일부는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고,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각 분야에서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던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 지도자들이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력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 인물로 이광수는 국방헌금과 학도병 출병 등을 적극 권유하였습니다. 이어 교육자와 문학자, 예인과 기업인, 나아가 종교인의 일부까지도 일제의 침략 전쟁 협력에 동참하였습니다. 상공업자들 가운데는 일제의 전시 호황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침략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동원되었습니다. 학생들도 각급 학교에서 황국 신민화 교육을 받아야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징용이나 징병에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일제에 대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계의 일부 교단과 학교, 그리고 주기철, 손양원 목사등은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였습니다. 일제의 일본식 성명 강요에 끝내 참여하지 않거나,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하기 위해 모든 공적 활동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 자녀를 학교에도 보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김구의 한국 국민당과 김원봉의 조선 민족 혁명당은 중국 내 독립운동의 양대 진영을 이루고 있었는데, 통일 전선의 방법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중, 일 전쟁의 절정기에 이르면서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양대 진영을 향하여 대동단결을 종용하였습니다. 김구와 김원봉은 모든 민족 운동 단체가 각 단체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공동의 정강 아래 단일 조직을 만들어 정치적 통합과 군사적 통일을 실현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조선 민족 혁명당과 한국 국민당 등 7개 단체가 전국 연합 진선 협회를 구성하여 민족적 통일 기구를 만들고, 정치 강령을 채택하였습니다. 이로써 중국 내 좌우양 진영이 한때 통일 전선 조직을 갖추는 데까지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사회주의 계열인 조선 의용대의 주력이 중국 공산군 지역인 화북 지방으로 옮겨가 그곳에 모여든 독립지사 및 청년들과 함께 조선 독립 동맹을 조직함으로써 실제적인 민족 통일 전선을 형성하여 행동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양 진영 간의 사상적인 괴리를 극복하지는 못함으로써 중국 내 독립운동 세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 독립 동맹으로 나뉘었고, 광복 이후 각각 남과 북으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정비하여 연합국에 참여함으로써 대일 항전에 나서는 동시에 건국 준비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일제의 패망에 대비하여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임시 정부가 건설할 국가의 정치 이념을 제시하고, 독립 전쟁의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기초한 건국 강령은 의회주의에 기초한 민주 공화국 건설을 표방하였고, 토지 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 친일파 청산 등이 주요 내용으로 구성되었습니다.여기에는 앞으로 건설할 국가의 행태를 국민 주권에 바탕을 둔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설정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사회주의 세력까지 끌어들여 사회, 경제 개혁을 통해 공정한 절차와 균등한 분배를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것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 건국과 제헌 헌법의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제가 1941년 12월에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임시 정부는 곧 한국광복군을 토대로 대일 선전 포고를 하였고, 한국광복군은 스스로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하여 독립 전쟁을 개시하였습니다. 드디어 1942년 5월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대 일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하자 이를 한국광복군 제1 지대로, 기존의 한국광복군을 제2 지대로 조직하였습니다. 중국 각지의 한인 청년들과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들을 조직하여 제3 지대로 편성하였습니다. 이로써 한국광복군은 3개의 지대 조직을 가진 군대다운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한국 광복권의 핵심 주력인 형성됨으로써 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중국에 살고 있는 2백만 명의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국광복군의 규모를 늘리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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