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강점 이래 일제는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식민지 동화 정책을 꾸준히 실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지 동화 정책에 맞서 국학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1 운동 이후 임경재 등이 중심이 되어 창립한 조선어 연구회는 한글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도시를 순회하며 월례 발표회를 진행하였습니다. 나아가 '가갸날'을 제정하고, "한글이란 잡지를 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어 연구회는 1931년에 조선어 학회로 개칭하고, 이어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말 큰사전" 편찬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출간하지 못하고,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을 주장하는 일제 식민 사관의 역사 왜곡에 맞서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역사 발전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역사 연구가 활발해졌습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을 저술하였고, 신채호는 고대사 연구를 통해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를 저술하였습니다. 이후 정인보와 문일평 등이 민족주의 사학을 계승하여 발전시켰습니다. 백남운은 마르크스 사관의 영향을 받아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하였는데, 일제 식민 사관의 정체성론을 정면으로 부정하였습니다. 이외에 이병도와 손진태 등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서술해야 한다"는 실증 사학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풍을 세웠습니다. 이들은 '조선과 인근 문화'를 연구한다는 목적으로 1934년에 진단 학회를 조직하였으나, 1942년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을 중지하였습니다.
일제하 종교인들은 일제의 회유와 탄압속에서도 항일 운동과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천도교는 민족 종교로서 이미 1910년대에 보성 전문학교와 동덕 여학교를 경영하고, 16개 학교에 보조금을 지급하였으며, 전국에 800여 개의 강습소를 설치하여 운영할 정도의 조직과 재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천도교는 이를 바탕으로 3.1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이후 1920년대부터는 청년, 여성, 어린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으며, "개벽", "여성", "어린이", "학생", "농민" 등의 잡지를 발행하여 대중 계몽에 앞장섰고, 농민의 지위 향상을 위한 계몽 활동과 농민 야학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도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교육과 의료, 사회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3.1 운동 당시 사립학교의 약 30% 정도가 기독교계 학교였을 정도로 기독교는 근대 교육에 힘을 쏟았으며, 근대 학문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천도교와 함께 3.1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민족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제 말에는 신사 참배 거부 투쟁으로 숭실 학교 등은 자진 폐교하였고, 주기철 목사 등이 순교하고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투옥되었습니다.
불교는 통제를 목적으로 한 일제의 사찰령 제정에 맞섰으며, 3.1운동 당시 다른 종교와 연합하여 참여하였습니다. 한용운은 불교 대중화와 항일 운동에 앞장섰고, 조선 불교 유신회를 조직하고 불교 개혁과 일본의 불교 통제에 맞서 싸웠습니다.
천주교에서는 간도의 평신도들이 대한 의민단이라는 무장 단체를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였습니다.
1916년 박중빈이 창시한 원불교는 불교의 생활화와 대중화를 주장하며 개간 사업과 저축 운동을 전개하고, 남녀평등과 허례허식의 폐지 운동을 통해 생활 개선을 추진하였습니다. 대종교는 매국노 처단을 전개하였고, 만주로 이동해 중광단을 비롯하여 정의단, 북로 군정서를 조직하여 국외 무장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습니다.
1910년대 최남선과 이광수가 주도한 문학은 개화기의 문학을 이어받아 계몽적 성격을 탈피하지 못했는데, 1920년대는 문학의 전환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문학이 드디어 목적성을 띤 계몽 수단을 넘어 순수 예술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에는 한용운, 심훈, 이상화 등이 탐미적이고 감상적인 문학에 대한 반발로 민족 정서와 민족 의식을 담은 문학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사회주의 영향으로 식민지의 계급 모순을 적극 비판하는 프로 문학이 등장하였는데, 이기영의 '고향'과 홍명희의 '임꺽정 전'등이 대표적이다.
1930년대에는 사실주의나 프로 문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현실에서 사회성을 회피하는 순수 문학의 경향이 나타나 식민지의 현실을 묘사하는 작품을 드물었습니다.
음악에서는 1920년대에 들어 전통 민요나 창가를 대신하여 새로운 가곡과 동요가 등장하였습니다. 미국과 독일에서 활동하던 안익태는 해외에서 애국가와 코리아 환상곡을 작곡하였습니다. 무용에서는 최승희가 한국 고정 무용을 현대화하여 보살춤, 부채춤, 칼춤 등을 세계 순회공연을 통해 널리 알렸습니다.
미술에서는 안중식 등이 서화 협회를 조직하여, 전통 회화와 서양화의 공생 발전을 모색하였고, 조선 총독부는 조선 미술 전람회를 열어 미술인들을 회유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이상범은 자주적인 조선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고, 허백력은 전통 화법을 고수하였습니다. 서양화의 김관호와 나혜석 등은 유학을 통해 유화 기법을 도입하였습니다.
연극에서는 도쿄 유학생을 중심으로 토월회가 조직되어 본격적인 신극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남녀 평등을 주장하고 봉건적 유교 사상을 비판하는 한편, 일제에 대한 저항을 형상화하기도 하였습니다. 1930년대의 극예술 연구회는 민족적 비극을 무대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유치진의 토막은 일제 강점기 농촌 사회의 평범한 두 가족의 삶과 역정을 통해 민족적 비극을 무대 예술화한 작품으로서 당시 소작농의 참상을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하여 많은 공감을 받았습니다. 1938년 일제의 탄압으로 극예술 연구회가 해체되고, 1940년 이후에는 일제가 일체의 민족주의적 예술 활동을 금지하여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연극 외에는 공연할 수 없었습니다.
영화는 부산에서 한국 영화 기업의 효시로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영화 활동이 본격화하였습니다. 나윤규의 아리랑은 전 국민의 호응을 받았고, 일본에서 상영되기도 하였습니다. 1930년대 중반에는 발성 영화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영화는 일제 침략 전쟁의 선전 도구로 전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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