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전후 해외에서는 당시 식민주의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던 사회 진화론에 대한 대안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었습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은 새로운 세계 질서의 원칙으로 민족 자결주의를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의 레닌은 제국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공산주의를 제시하였습니다. 또한, 크로폿킨 등은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하는 아나키즘을 주장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국제 연맹이 탄생하게 되었고 제국주의 국가 간의 이해 조정이 일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의 독립 문제가 국제적 현안으로 다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 흐름은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의 민족 운동에도 영향을 주어 다양한 형태의 운동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민족 실력 양성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등 다양한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3.1 운동 이후 제한적으로 허용된 언론, 출판 매체를 통해 세계의 동향과 사조가 국내에도 소개되었고 새로운 민족 운동을 모색하는 데 큰 역활을 하였습니다. 특히, 일부 민족 운동의 지도자들은 워싱턴 회의 등의 국제 정세를 지켜보면서, 열강들이 한국인의 독립열망에 대해 냉담하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장래에 일제로부터 해방도 어렵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장 일제와 싸우기보다는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장래의 독립을 준비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3.1 운동을 통하여 독립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하였으니 이제는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 역량을 기르고 외교 활동을 통하여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아 독립을 하자는 새로운 전략이 제기되었습니다. 이에 때라 경제, 교육, 언론, 문화, 예술 등 각 분야에서 독립 역량을 축적하기 위한 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일제는 회사령 철폐에 이어 일본과 한반도 간의 무관세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일본 기업의 한반도 침투가 용이해졌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우리 민족도 기업을 세워 경제적 발전을 꾀하여 하였습니다. 그러나 민족 기업은 기술이나 자본의 측면에서 일본 기업에 비해 취약하였고, 정책 및 금융의 뒷받침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민족 운동가들은 일본 기업에 맞서 국산품 장려와 근검절약을 통하여 민족 기업을 육성하고, 민족의 자립 경제를 이루자는 물산 장려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20년 8월 평양에서 조만식 등 민족주의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물산 장려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평양에는 양말 및 메리야스 공장 등이 여러 개 가동되고 있었으며, 고무신 공장도 세워져 한국식 제품을 개발하여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경성에서도 자작회가 설립되고, 각 지역에서는 금주, 단연회가 조직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들 각 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1923년 조선 물산 장려화를 결성하였습니다.
조선 물산 장려회는 산업 장려, 국산품 애용, 경제적 지도 등의 활동 방침을 수립하고, 전국에 분회를 설치해 대중적 계몽 운동을 1930년대 말까지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산 장려 운동은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자본가와 상인의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비판을 받았습니다.
3.1운동 이후 교육을 통해 실력을 기르려는 운동도 활발하였습니다. 한규설, 이상재 등 민족 지사들은 조선 교육회를 설립하여 교육의 기회균등을 위한 학교 증설, 교육 차별 폐지, 한국어 교육 용어 사용, 한국사 교육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일제는 '문화 통치'를 내세워 조선 교육령을 개정하였습니다.
조선 교육 협회는 총독부에 대학 설립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되자, 우리 손으로 대학을 설립하자는 운동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재, 현상윤, 이승훈 등은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를 조직하고, 한민족 천만이 한 사람 일원씩이라는 구호 아래 1000만 원 모금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받았으며 , 만주, 미국, 하와이 등지로도 퍼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1924년에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였습니다.
여성 교육을 조직적으로 추진할 목적으로 차미리사 등을 중심으로 조선 여자 교육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차미리사는 전국적으로 순회강연과 토론회를 개최하였고, 직접 근화 여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습니다.
1925년 전국 604개의 사립학교 가운데 257개는 종교계 학교였습니다. 지역적으로 함경도와 평안도에 많았습니다. 특히 평안도에는 기독교 계통의 종교 학교가 일반 학교보다 2배 이상 많았습니다. 이들 사립학교들은 일제 강한 통제를 받으면서도 민족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일부의 사립 학교들은 전문학교로 승격하여 우리 민족의 힘으로 고등 교육을 실시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밖에도 야학, 강습소, 개량 서당 등이 민족 교육 기관으로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습니다.
일제는 한국에서 과학 기술 교육은 거의 실시하지 않았는데,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우리 민족의 관심을 높이고 긍지를 심어 주었습니다. 동아일보 등 언론들이 과학의 대중화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1924년에는 김용관 등이 중심이 되어 발명 학회를 창립하였습니다. 과학 조선 창간과 과학 지식 보급회 조적을 통하여 과학의 날 행사를 개최하였으며, 과학의 대중화와 과학 지식 보급에 노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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