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 문화의 보급과 함께 성장한 여러 날 중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만이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습니다. 율령을 반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영토 확장을 위한 활발한 정복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불교를 통한 사상통합과 왕권의 강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가야는 삼국의 각축 속에서 중앙 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채 신라와 백제에 흡수되었습니다.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발전한 것은 고구려였습니다. 태조왕은 옥저와 동예 등을 정복하고 요동을 공략하였습니다. 그리고 고 씨의 왕위 세습을 이루는 등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고국천왕은 부족적 전통의 5부를 행정적 성격의 조직으로 바꾸었고, 부자 상속의 왕위 계승 방식을 이루어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를 더욱 진전시켰습니다.
백제는 한강 유역에서 토착 세력과 고구려 계통 유이민 세력이 결합하여 건국되었습니다. 3세기 중엽 고이왕은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율령을 반포하였습니다. 또한, 관등제 정비, 관복제 도입 등지 체제를 정비하여 고대 국가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신라는 경주 지역의 토착 세력과 유이민 세력이 결합하여 건국하였습니다. 4세기 내물왕은 김 씨에 의한 왕위 세습을 이루고, 마립간이라는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낙동강 동쪽 지역을 장악하고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이룩하였습니다. 근초고왕은 부자 상속의 왕위 계승을 이루었으며, 마한의 잔여 세력을 정복하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하였습니다.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전사하면서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태학을 설립하는 등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광개토대왕은 활발한 정복 활동을 바탕으로 만주 지방을 대부분 차지하였고,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하면서 신라와 가야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장수왕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확보하였으며, 당시에 분열, 대립하고 있던 중국의 남북조와 각각 교류와 견제를 하여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투었습니다.
한편, 백제는 5세기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대항하여 신라와 나˙제 동맹을 체결하였습니다. 수도를 웅진으로 옮긴 백제는 6세기 성왕 때 다시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며 백제의 중흥을 꾀하였습니다. 또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으나 곧 신라에 한강 유역을 빼앗겼습니다. 이에 신라를 공격하다가 성왕은 관산성에 전사하였습니다.
신라는 6세기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지증왕은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우산국을 정복하였습니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며 금관가야를 정복하는 등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정비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습니다. 또한, 위로는 함흥평야 지역까지 진출하였고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는 등 삼국 통일의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가야는 높은 농업 생산력과 철의 생산, 그리고 중계 무역을 통한 비교적 안정된 경제 활동 등을 배경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특히, 가야가 형성된 지역은 품질이 좋은 철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었습니다. 가야는 철을 낙랑군과 왜에 수출하는 이점을 살리면서 성장하였습니다. 3세기경 가야의 여러 소국은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가야연맹을 이루었는데, 이를 전기 가야 연맹이라고 부릅니다. 전기 가야 연맹은 왜에 밀접한 정치, 경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라를 견제하며 성장하였습니다.
가야 연맹은 신라를 도와 왜군을 격퇴한 광개토 대왕의 군대에서 공격을 당한 후 5세기에 고령의 대가야 연맹으로 세력이 개편되었습니다.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 연맹은 소백산맥 서쪽까지 영토를 확대하고 중국과 교류하며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는 등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압력으로 불안한 정치 상황이 계속되더니 결국 신라의 법흥왕 때에 금관가야가, 진흥왕 때에 대가야 통합되면서 멸망하였다.
가야는 왜와 활발한 교류를 하였고, 이로 따라 가야의 문화가 일본의 고대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를 통일한 수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고구려를 여러 차례 침략해 들어왔습니다. 수 문제가 고구려의 공격에 실패하자, 그의 아들 양제는 또다시 거대한 원정군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요동성을 계속 넘지 못하였고, 수의 별동대는 을지문덕에 의해 살수에서 크게 격파당하였습니다. 결국, 수는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하고 내부 분열까지 겹쳐 멸망하였습니다. 수의 침략을 경험한 고구려는 이후 중국의 침략에 대비하여 국경 지방에 천리 장성을 축조하였습니다.
수의 멸망 이후 당 태종은 수의 고구려 침략의 실패를 교훈 삼아 국력을 축조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요동성이 함락되면서 위기를 맞았으나 안시성에서 군,민이 합심하여 60여 일간이나 당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고구려군이 전면적으로 공격의 기세를 보이자 당 태종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구려가 중국의 수와 당의 침략을 막아 낸 것은 고구려뿐만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대한 침략을 저지하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한편, 고구려는 잇단 중국과의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상실한 후 재기를 도모하여 한때 신라를 크게 위협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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