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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건국

by ㎣㎤㎥㎦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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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기에는 중앙 귀족들의 왕위 다툼과 지방 호족의 등장, 각지의 농민 봉기 등으로 말미암아 정부의 직접적인 지배력이 경주 일대밖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배경으로 견훤이 완산주에 후백제를 세웠다. 궁예는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이후 국호를 태봉으로 고쳤다.

궁예가 세력을 넓히고 있을 무렵, 송악 지방에서는 왕건의 집안이 예성강 유역의 군진 세력과 연합하여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다. 그 후 궁예의 세력이 송악에 미치게 되자 왕건은 궁예에게 귀순하여 그의 부하가 되었다.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금성,진도 등 후백제의 배후 지역을 점령하여 후백제가 중국 및 일본으로 통하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공로에 힘입어 왕건은 시중의 자리까지 오르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한편, 궁예는 호족으로서의 토착 기반이 약한 데다 미륵불을 자처하는 등 실정을 거듭하여 민심마저 잃었다. 이에 신하들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나라 이름을 고려, 연호를 천수라고 정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철원에서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왕건은 세금을 줄이는 정책을 실시하여 민심을 얻었고, 호족의 지원을 받아 후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밖으로는 중국의 여러 나라와 외교를 맺어 대외 관계를 안정시켰습니다. 왕건은 후백제를 공경하는 한편, 신라와는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러던 중 후백제에서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나, 견훤이 큰아들 신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고려에 귀순하였습니다. 이후 후백제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해진 신라의 경순왕은 귀족들과 함께 고려에 항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건은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무찌르고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발해의 유민까지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민족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새로운 지방 세력이 중앙에 진출함으로써, 골품제에 의해 운영되었던 신라에 비해 개방적인 사회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지방의 자율성을 인정함으로써 중앙 문화와 지방 문화를 함께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태조는 국가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던 지방 호족을 포섭하고 견제하였습니다. 태조는 여러 호족과 혼인 관계를 맺었으며, 유력한 호족에게 왕씨 성을 내려 주었고, 일부 호족에게는 향촌 사회의 지배권을 부분적으로 인정해 주어 우호 관계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방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사심관 제도와 기인제도를 활용하였습니다.

고려의 중앙 정치 기구는 당, 송의 제도를 바탕으로, 신라의 관제를 참고하여 고려의 실정에 맞게 정비되었습니다.

최고 통치 기구는 2성 6부이며,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중서문하성과 6부를 거느린 상서성을 두었습니다.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관인 재신과 추밀이 모여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회의 기구였습니다.

고려의 지방행정조직은 성종 때 처음으로 12목을 설치하면서 정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국을 크게 5도와 양계, 경기로 나누고, 그 안에 3경, 4도호부,8목을 비롯하여 군,현과 진을 설치하였습니다. 일반 행정 구역인 5도에는 안찰사를 파견하였습니다. 국경지대에는 양계를 설치하고 병마사를 파견하였습니다.

고려의 군산 제도는 중앙군인 2군 6위와 지방군인 주현군, 주진군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중앙군은 전문적인 직업 군인과 개경에 올라와 교대로 근무를 하는 4만 5천 명 정도의 농민군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지방군은 16세부터 59세까지의 일반 농민 장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5도에 설치된 주현군은 농업에 종사하면서 지방의 방어와 군사 훈련 및 노역에 동원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 관리가 될 수 있는 방법에는 과거제가 있었습니다. 과거 시험은 문관을 뽑는 제술과와 명경과, 기술관을 뽑는 잡과, 승려를 뽑는 승과로 구성되었습니다.

과거 시험은 양인 이상이면 응시할 수 있었으나, 제술과나 명경과에는 주로 귀족과 향리의 자제들이 응시하였고, 백정이라 불리던 농민은 주로 잡과에 응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는 무관을 뽑는 무과는 시행되지 않았으며, 무관의 집안이나 군인 가운데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따로 뽑아 무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성종 이후 국가 체제가 확립되면서 새로운 지배 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호족 세력의 일부는 중앙의 정치 무대로 진출하였으며, 6두품 계열의 유학자들도 과거를 통해 새로운 지배층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들 중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료를 배출한 가문은 문벌 귀족을 형성하였습니다. 문벌 귀족은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관직을 독점하고,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위 관직을 차지하였으며, 왕실이나 유력한 가문끼리 혼인 관계를 맺어 지배력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러나 문벌 귀족의 특권이 확대됨에 따라 왕실과 문벌 귀족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발생하였습니다. 또한, 지방 출신으로 새롭게 등장한 세력 가운데 일부는 왕의 측근이 되어 문벌 귀족과 대립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갈등으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인 문벌 귀족 가문이었던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과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으며 가장 유력한 외척 가문이 되었습니다. 이 자연에 이어 그의 손자 이자겸도 예종과 인종의 외척이 되어 왕권을 능가할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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