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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와 발해

by ㎣㎤㎥㎦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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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후 신라는 무열왕 직계 자손의 왕위 세습이 이루어지면서 왕권의 전제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기능이 강화되고 진골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의 권한은 약화하였습니다. 특히,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을 계기로 진골 귀족 세력을 약화하고, 6두품 세력을 국왕의 조언자로 삼아 행정 실무를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6두품 세력으로 진골 귀족 세력을 견제함으로써 왕권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또한, 신문왕은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여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했고, 9주 5소경과 9서당 10정의 지방 및 군사 제도 정비 등을 통하여 통치 체제도 확립하였습니다. 특히, 지방에 5소경을 설치한 이유는 수도가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지방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며 지방 문화의 중심지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유교 정치 이념을 활용하기 위하여 유학 사상을 강조하고, 국학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경덕왕 때 진골 귀족 세력의 반발로 녹읍이 부활하였고, 귀족의 향락과 사치 생활이 심해져 왕권은 서서히 약화하였습니다.

진골 귀족 세력에 의해 무열왕의 마지막 직계 자손인 혜공왕이 살해된 이후 신라는 치열한 왕위 다툼으로 150여 년 동안 20여명의 왕이 바뀌는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왕권은 크게 약화하였고 진골 귀족 세력은 왕위 쟁탈전에 빠져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였습니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하면서 김헌창의 난 등 반란이 발생하였습니다. 또한 농민들에게 가혹한 세금 수취가 계속되면서 불만이 증가하여 9세기 말 진성 여왕 때는 전국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당에 유학하였던 6두품 세력은 새로운 유교 정치 이념을 제시하며 골품제로 인한 사회 불만을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좌절되었습니다. 이에 지방에서 새롭게 성장한 세력들과 손을 잡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주도하였습니다.

중앙 정부의 혼란과 지방에 대한 통제력 약화는 호족의 성장을 촉진하였습니다. 호족은 광대한 토지와 막대한 사병을 거느리고 성주나 장군으로 자처하였습니다. 이들은 전국 각처에서 일정한 지역을 점거하고 그곳에서 세력을 확대해 나가던 독립적 존재로서 독자적인 행정조직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6두품과 연계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성장한 견훤과 궁예, 왕건은 대표적인 호족 세력이었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지방 호족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선종과 풍수지리설이 크게 유행하였고, 새로운 사회 건설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였습니다.

신라는 통일 후 고구려와 백제 문화를 통합하여 민족 문화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삼국의 문화가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혈연적 동질성과 문화적 공통성 때문이었습니다. 삼국은 언어와 풍속이 비슷하였는데, 신라 사신이 중국의 양나라에서 백제인을 통역으로 이용할 정도로 언어가 비슷하였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민족 통합을 위해서 노력한 신라는 나,당 전쟁 과정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옛 지배층에 신라의 관등을 주었고,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중앙군인 9서당에 편성하는 등 융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반면, 통일 이후에도 골품제의 엄격한 신분 차별은 계속되었습니다. 진골 귀족들은 중앙 관청의 장관직, 지방 장관 등을 모두 차지하고, 화백 회의를 통하여 국가 정책을 결정하였습니다. 6두품 세력은 국왕을 보좌하는 등 정치적으로 성장하였지만 골품제로 인해 여전히 신분적 제약을 받았습니다.

통일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은 수도인 금성에 호화 주택과 별장을 짓고 여유 있는 생활을 즐겼습니다. 금성은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귀족들이 모여 사는 대도시로 번성하였는데, 궁궐, 관청, 사원, 귀족들의 저택, 민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또한,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조세와 공물, 국제 무역품이 모여드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포석정, 월지등은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좁은 토지에서 농사를 짓거나 이마저도 없는 경우에는 귀족들의 토지를 빌리는 대가로 수확량의 많은 부분을 바쳐야 했으며 군역과 부역, 공물의 부담도 컸습니다.

신라 하대에는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 확대로 자영농들이 몰락하는 등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농민들은 몰락하여 유랑민이 되거나 노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신라 사회의 모순이 지속되면서 9세기 말 진성 여왕 때는 상주에서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농민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하였습니다.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들이 부흥 운동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였습니다. 고구려 유민들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에 대한 투쟁을 계속하였습니다. 거란의 이진충이 당의 지배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요서 지방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때 고구려 장군 출신 대조영이 당군의 추격을 피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이동하여 지린성 둔화 동모산 기슭에서 발해를 건국하였습니다.

발해는 8세기 초 무왕 때 동북쪽으로 영토를 더욱 확장하였고, 장문휴에게 수군을 이끌고 가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당은 신라에 발해를 공격하도록 하고 요서 지방에 발해군을 공격하였습니다. 발해는 이에 맞서 돌궐, 일본 등과의 교류를 강화하여 당과 신라를 견제하였습니다.

8세기 중반 문왕 때부터는 당과의 적대 관계를 끝내고 친선 관계를 맺었으며, 당의 문물을 본받아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신라와는 신라도를 열어 교류하였으며,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기는 등 통치 체제 정비를 반영하였습니다.

9세기 선왕 때에는 요동 지역까지 진출하는 등 영토를 더욱 넓혔습니다.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하였으며, 당과의 활발한 교류로 문물이 발달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하여 당시 중국은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귀족들 간에 내분이 발생하여 국력이 약화한 상황에서 발해는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하였습니다. 발해의 멸망 이후 발해 유민들은 고려로 망명하였고, 왕건은 이들을 우대하여 동족 의식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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