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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건국

by ㎣㎤㎥㎦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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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이후 원은 왕위 계승의 불안정과 재정 운용의 실패로 국력이 약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라마교 행사 등으로 교초를 남발함으로써 물가가 상승하였고, 1351년의 대홍수로 황허강이 범람하여 농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중원 일대에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세력을 떨쳤으나, 원의 군대에서 쫓겨 만주로 진출하였고,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였습니다.

홍건적의 제2차 침입 때 개경이 함락되었는데, 이때 이성계가 사병 2,000명을 이끌고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습니다. 결국, 고려를 침공한 홍건적은 전멸하였고, 중국 강남에 남아 세력을 키운 주원장은 명을 건국하였습니다. 주원장이 원의 수도인 대도를 점령하고 천하를 평정하자, 원 순제는 중원을 포기하고 북방으로 도피하였는데, 이때부터 북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원의 주인공이 원에서 명으로 바뀌면서 동아시아는 상호 간의 교류는 물론, 다른 세계와의 교역도 급격히 줄어들고 문화의 통합성도 약화하였습니다. 태조 홍무제는 몽골 풍습을 금지하고 유교를 적극적으로 보급하였습니다. 또한, 이갑제를 실시하고 토지 측량과 인구 조사를 전국적으로 행하여 국가 재정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자영농을 육성하고 보호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려는 정책도 추진하였습니다.

명의 3대 황제인 영락제는 베트남과 수마트라까지 원정하여 직할 지배지로 하였고, 환관 정화를 시켜 7차례에 걸친 남해 원정을 추진하였습니다. 또한,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한림원을 세워 유학을 장려하였습니다.

고려 무신 정권은 행정을 위해 문서 작성에 능한 새로운 관인층을 등용하여 실무를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은 무신 정권하에서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으나 충선왕과 공민왕이 반원 개혁 정치를 시도할 때 측근 세력으로 참여함으로써 하나의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이들을 신진 사대부라고 합니다.

특히 충선왕 때 베이징에 있던 이제현이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습니다. 당시 성리학은 고려의 신진 사대부들에게 확산하여 그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14세기 후반 중원은 원,명 교체기였습니다. 일본도 남북조로 분열된 혼란기였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는 군사적 충동의 가능성이 상존하였습니다. 실제로 고려는 북으로부터 홍건적의 침입과 남으로부터 왜구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태조부터 성종에 이르는 100여년간은 국가의 이념과 통치 체제가 확립되는 시기였습니다. 태조는 단군 조선과 기자 조선을 계승하고 삼국의 유민을 통합한다고 하여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교통이 편리한 한성을 수도로 정하였습니다.

태종은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고 사병을 혁파하는 한편, 호패법과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국가 재정 기반을 확충하였습니다. 또한, 6조의 관료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보고 하도록 하는 6조 직계제를 시행하고 신문고를 설치하여 왕권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교적 왕도 정치를 펼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으며, 과학 기술의 발전과 백성들의 복지 진흥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쓰시마 섬을 정벌하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세조는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하였기 때문에 정통성이 취약하였습니다. 그래서 왕권을 안정시키고 경제와 국방을 강화하는데 힘썼습니다. 그는 요충지마다 진관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복무하는 군인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보법을 실시하였습니다.

성종은 사림 세력을 등용하여 훈구 세력과 조화시키면서 건국 초부터 추진해 오던 문물 개혁 사업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조선은 문치주의를 지향하였으나 국초에는 국방에 힘썼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6세 이상 60세 이하 모든 양인 남자는 현역 군인인 정군이나 그 비용을 부담하는 봉족에 편성되어 군역의 의무를 졌습니다. 정군은 약 30만 명 정도였고, 봉족의 수는 세종 대 70만명, 세조 대 100만명으로 늘었습니다.

군사 조직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뉘었는데, 중앙군은 궁궐과 수도를 방위하는 5위로 구성되었습니다. 그 지휘는 문반 관료가 맡았습니다.

정규군 외에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이 있었고, 군사 조직의 일환으로 교통과 통신 제도가 운영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전국의 모든 군현에 고을의 크기에 따라 향교를 설치하였습니다. 향교와 부학의 학생들은 국비로 교육받았으며, 학문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유학으로 불리면서 사회적 존경을 받았고,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더 높은 학문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최고 학부인 성균관에 입학하였습니다. 정원은 생원과 진사 각각 100명씩 200명이었습니다.

16세기 이후 지방에 세워진 서원은 구조와 내용이 향교와 비슷하였습니다. 그러나 서원마다 사당에 모신 선현이 각각 달라 독특한 학풍을 이루었습니다. 기술 교육은 잡학이라 불렀는데, 해당 기술 관청에서 담당하였습니다.

조선은 농본주의에 근거하여 농업을 국가 경제의 근간으로 삼아 국가 재정도 주로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농경지의 확보와 농업 생산력의 증대는 국가적 관심사였습니다. 특히 상공업에 대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엄격하게 통제하였습니다. 당시 유학자들은 상품의 생산과 유통에 대해 국가가 통제하지 않을 경우, 농민들이 상공업에 뛰어들어 농업이 피폐해지며 사치와 낭비가 조장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경제관으로 도로와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화폐의 유통도 제한되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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