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는 신분을 법적으로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하는 양천 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양인은 국가의 지배만을 받는 자유민이었습니다. 조세와 국역 등의 의무를 지녔습니다. 천인은 관청이나 양반에게 소속된 비자유민으로써 원칙적으로 관직에 나갈 수 없었으며 국역이 면제되었습니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문벌, 관직, 토지 등을 차지한 특권적인 지배 신분층이 생겼습니다. 양인 내에서도 양반, 중인, 상민으로 분화되었습니다. 지배층 내에서도 다시 양반과 중인으로 나뉘었습니다.
양반은 경제적으로는 지주였고, 정치적으로는 관료 또는 관료 예비군으로 조선 사회를 지배한 신분이었습니다. 이들은 현직 또는 예비 관료로 활동하며 유학적 소양과 자질을 키우는 독서 활동에 몰두하였습니다. 또한, 최고의 지배층으로 각종 국역을 면제받으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특권을 보장받았습니다.
중인은 지배층인 양반과 피지배층인 상민 사이에 위치한 중간 신분층을 말합니다. 기술관, 향리, 서리, 서얼 등이 해당하며, 이들은 양반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역관은 대외 무역에 관여하여 재물을 축적하였으며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면서 그 위세를 행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외에 중인들은 전문 기술이나 행정 실무를 담당하면서 나름대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해 나갔습니다. 또한, 이들은 직역을 세습하고 같은 신분끼리 혼인하면서 하나의 신분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양반의 첩의 자식은 서얼이라 하고 차별받았습니다. 이들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고 주로 무과나 잡과를 통해 관직에 등용되었으나 승진에 제약이 있었습니다.
일반 평민인 상민은 농민, 수공업자, 상인을 말합니다. 상민의 대부분을 차지한 농민은 조세,공납, 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습니다. 수공업자는 관영 수공업이나 민영 수공업에 종사하였습니다. 상인에는 시전 상인과 보부상 등이 포함되는데, 국가의 통제하에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천민의 대부분은 노비였습니다. 노비는 개인이나 국가의 재산으로 취급되어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유주에 따라 솔거 노비와 외거 노비로 구성된 사노비, 입역 노비와 납공 노비로 구성된 공노비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 밖에 백정, 무담, 창기, 광대 등도 천민에 속하였습니다. 한편, 조선 시대에 향,소,부곡을 일반 면,리제로 개편하여, 이곳의 주민들을 양인으로 승격시켰습니다. 이는 양인을 늘려 국가 재정의 기반을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나타난 정책이었습니다.
성리학은 조선의 건국에 가장 중요한 사상적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조선 초기 성리학에 바탕을 둔 관료들은 성리학 이론의 탐구보다는 유교적 제도의 완비와 성리학적 이념의 교육과 보급에 더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15세기 학문을 주도하였던 관학파 계열의 관료들은 성리학 이외에도 국가 체제 정비에 필요한 여러 학문과 사상을 수용하였습니다.
세종 때에는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새로운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유교적으로 모범이 될 만한 행적을 모아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여 이를 백성에게서 보급하기도 하였습니다.
16세기 향촌 사회에서 기반을 확립한 사림은 민간의 생활까지 성리학적 윤리서를 보급하려고 하였습니다.
16세기 중엽 등장한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된 일종의 지방 사립 학교였습니다. 서원은 우선 국가에 의해 설립된 지방 향교가 과거 시험의 준비 기관으로 전락하게 되자 순수한 학문 연마와 유학 진흥을 위해 지방의 선비들을 중심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이후 성종 때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들이 여러차례의 사화를 겪고 향촌으로 내려가 많은 서원을 만들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성리학 이념을 널리 보급하였습니다. 최초의 서원은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으로 이서원은 후에 이황의 건의로 국왕으로부터 소수 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았습니다. 이후에도 많은 서원이 사액을 받았으며, 국가는 책과 토지, 노비를 지급하고 세금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지방 양반들은 서원에 모여 성리학을 공부하고 문예의 기량을 겨루었으며, 당시의 행정이나 정치에 대한 의견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또한, 서원의 운영에 참여하고, 때로는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중앙 정치에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서원과 함께 향촌 사회에서 사림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기여한 것은 향악이었습니다. 향촌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서로 돕고 좋은 일을 권하는 풍속이 내려오고 있었는데, 사림 세력은 이러한 전통 위에 유교 윤리를 더하여 향촌 사회의 자치 규약인 향약을 만들었습니다.
16세기 이후 정계에 등장한 사림은 자신들의 근거지를 바탕으로 서원을 건립하고 제자를 기르며 성리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켰습니다. 이 시기의 성리학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이황과 이이였습니다.
훈구 세력이 지배하던 15세기에는 민생의 안정과 국방력의 강화라는 필요성 때문에 기술 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또한, 성리학을 사회 개혁의 원리로 이해하였고, 성리학 이외의 사상도 포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16세기 이후 사림이 정권을 담당하면서 사람의 취향이나 가치관이 문학과 예술에 반영되었습니다. 특히, 조선 중기에는 가사 문학이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건축에서는 서원이 많이 건립되었는데,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한 양반 사대부의 소박함이 담겨있습니다. 공예에서는 실용성이 강조되었고, 도자기는 분청사기 대신 깨끗하고 담백한 멋을 풍겨 사림의 취향과 잘 어울리는 세련된 백자가 생산되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