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권 회복을 위해 전개되었던 애국 계몽 운동과 항일 의병 투쟁은 을사늑약의 체결을 전후하여 국권 피탈 이후 민족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1910년 국내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무단 통치 아래에서도 비밀 결사의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독립 의군부는 1912년 고종의 비밀 지시를 받은 임병찬이 유생들을 규합하여 조직하였습니다. 독립 의군부는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 및 주요 관리들에게 일제의 국권 피탈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국권 반환을 촉구하는 요구서를 보냈습니다. 또한, 고종의 복위를 꾀하며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전국적인 의병 전쟁을 계획하였습니다.
공화 정치를 목표로 한 대한 광복회는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을 주축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전투적인 군대식 조직을 갖춘 대한 광복회는 만주에 무관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았으며, 친일 부호들을 처단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부 회원들은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습니다.
조선 국민회는 평양의 숭실 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이 주축이 되어 1917년에 만들어졌습니다. 해외 동포와의 연락 도모, 간도에서의 회원 모집, 군자금 모금 운동 등을 전개하였습니다.
한편, 1909년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남아있던 의병들의 항일 투쟁도 지속되었습니다. 특히, 채응언은 1915년 체포될 때까지 부하 수백 명을 거느리고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등지에서 일제에 대한 무력 항쟁을 계속하였습니다.
만주와 연해주, 미주 등 국외에서도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민족 지도자들은 이들 지역에 한인 집단촌을 만들고, 그곳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였습니다.
서간도의 삼원보에서는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등 신민회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경학사, 부민단 등의 한인 자치 기관을 조직하였으며, 1911년에는 신흥 강습소를 세워 민족 교육과 군사 교육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습니다.
북간도에서는 이상설, 김약연 등이 용정촌과 명동촌을 중심으로 서전서숙과 명동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고, 독립운동 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였습니다.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신한촌이라는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이상설, 이동휘 등은 1911년 권업회를 조직하고 권업신문 발간 등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양하였습니다. 권업회는 시베리아와 만주, 미주에 있는 무장 독립운동 단체를 모아 1914년 대한 광복군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미주 지역에서는 장인환, 전명운 의거를 계기로 대한인 국민회가 만들어져 신한민보를 발간하고, 군자금을 모아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습니다. 하와이에서는 박용만이 대한인 국민회의 연무부 운영의 대조선 국민 군단에서 군산 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중국 상하이에서는 김규식, 여운형, 신규식 등이 중심이 되어 1918년 신한 청년당이 조직되었습니다. 신한 청년당은 독립을 위해 다양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일제의 강압적인 무단 통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가는 가운데 제 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독립운동에 유리한 정세가 조성되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레닌은 전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1918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도 민족 자결 주의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를 기회 삼아 독립을 쟁취하려는 노력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중국 상하이에서는 신한 청년당이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고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민족 대표로 파견하였습니다.
연해주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이 윤해, 고창일을 파리로 보내 독립을 호소하고자 했으나 파리에 도착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미주의 대한인 국민회에서도 이승만, 정한경을 파리에 파견하려고 하였습니다.
만주에서는 독립운동가 39명이 육탄 혈전을 결의한 대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고, 일본 도쿄에서는 유학생들이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습니다.
한편, 국내에서도 국제 정세의 변화에 주목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천도교, 불교, 기독교 등 종교계와 학생들은 독립 선언서를 만들고 독립 선언식과 시위 운동을 준비하였습니다. 손병희, 한용운, 이승훈 등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민족 대표 33인과 학생들은 고종의 인산일에 많은 군중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대규모 시위를 통해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릴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민족 대표들은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여 전국 주요 도시에 미리 배포하였습니다. 이들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를 함으로써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 주민 임'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1919년 3월 1일, 경성을 비롯하여 평양,진남포, 안주, 의주 , 선천, 원산 등에서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경성을 비롯한 도시에서 시작된 시위는 빠르게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농민과 노동자 등 민중이 시위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민중들은 격문을 제작하고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운동가를 만들어 부르면서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3.1운동의 규모는 대단하였는데 5월까지 전국에서 1700여 회의 시위가 열렸고 100만여 명이 시위에 동참하였습니다.
3.1운동은 국외로도 확산되었습니다. 만주와 연해주는 물론 미주 지역에 이르기까지 해외 곳곳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으며 일본의 무자비한 식민 통치가 국제 사회에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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