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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와 간도

by ㎣㎤㎥㎦ 202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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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어로 활동 및 살림 채벌 등을 위해 불법으로 울릉도에 들어와 거주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이에 조선 정보는 일본에 외교 문서를 보내 항의하였습니다.  한편, 1882년에는 울릉도와 부속 도서에 대한 쇄환 정책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리고 육지 이민을 이주시키고 관리를 파견하는 등 대책을 마련하였습니다. 

 1881년 고종은 이규원을 울릉도 검찰사로 임명하여 1882년에 현지 조사를 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에 이규원은 100여 명의 조사단을 이끌고 울릉도를 조사하여 울릉도 검찰 일기와 울릉도 지도를 고종에게 제출하였습니다. 이규원은 일기에서 울릉도에서는 조선인 140명과 일본인 78명이 울릉도에 들어와 살고 있었습니다. 한 치의 땅이라도 소홀히 여길 수 없었으므로 울릉도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1882년 고종은 울릉도 개척령을 내리고 김옥균을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동남 제도의 개척사로 임명하였습니다. 김옥균은 이주민 16호 54명을 모집하여 섬에 이주시켰습니다. 그리고 식량과 곡식의 종자, 가축, 무기 등을 지원하는 등 그들의 정착을 도왔습니다. 

 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 이후 일본인들의 불법 거주로 인한 도민들의 피해가 심각해지자, 대한 제국 정부는 1900년 6월 한일 양국 조사단을 구성하고 울릉도 현지 실태 조사에 나섰습니다. 이 조사단에는 우리나라 조사관 우용정과 일본인 부영사 아카쓰카 쇼스케, 그리고 입회인 자격으로 부산 해관 감리서의 직원이었던 영국인 라포테가 참가하였습니다. 

 우용정의 보고서를 토대로 1900년에 발표된 '대한 제국 칙령 제 41호'는 울릉도와 독도가 대한 제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근대 국제법 체계에 따라 선언한 중요한 칙령이었습니다. 칙령 제41호에 따라 울릉도는 울도로 개칭되어 강원도에 부속되었으며, 강원도의 27번째 군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울도권은 남면과 북면으로 나뉘었는데, 독도는 울도군 남면에 속하였습니다. 이어 대한 제국 정보는 울도군 초대 군수로 배계주를 파견하여 울릉도 본섬과 함께 독도를 관할하게 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1870년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1877년의 태정관 공문서에서 울릉도 독도가 조선의 부속 영토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1905년 독도를 불법적으로 자국 영토에 편입하였습니다.

  러일 전쟁때 일본인 나카이는 독도에서 강치잡이 독점권을 대한 제국에게 신청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절차를 협의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한국 땅이라는 의혹이 있는 쓸모없는 암초를 편입할 경우, 외국의 여러 나라에 일본이 한국을 병탄 하려고 한다는 의심을 갖게 할 수도 있다"라며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인식을 분명히 가졌습니다. 그러나 일본 해군성과 외무성은 이 기회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고, 그곳에 러시아 함대 감시를 위한 망루를 설치하고자 하였습니다. 

 일본은 1905년 1월 내각 회의에서 "타국이 량코도를 점유했다고 인정할만한 형적이 없다"라고 하면서 국제법상 무주지 선점론에 의거하여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이어 2월에는 '시마네 현 고지 제40호'를 발표하고, 독도를 시네마 현에 편입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영토 선점 시 관련 당사국에게 통고해야 하는 국제법적인 요건을 갖추지 않았다. 일본 관보나 신문 어디에도 고시하지 않았으며, 시마네 현의 현보에만 고시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이는 일본 정부가 독도 편입을 비밀리에 진행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독도 침탈은 불법적인 조치이며 국제법상 무효인 것이었습니다. 

 1906년 4월 일본의 시마네 현의 관리 일행이 일본 영토에 새로 편입된 독도를 시찰하러 갔다가 울도 군수 심흥택을 방문하였습니다. 일본의 독도 편입 결정 사실을 알게 된 심흥택은 "본군 소속 독도가 일본의 영지로 되었다고 일본인들이 통지하므로 이에 대한 조치를 바란다"라고 강원도 관찰사에게 보고하였으며, 이는 중앙 정부에도 보고되었습니다. 

 보고를 받은 내부대신과 참정대신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것"이라며, 사실 관계를 다시 조사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미 1905년 11월 을사늑약의 체결로 외교권이 박탈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떠한 외교적 항의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언론은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 조치의 불법성을 보도하였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무변불유라는 제목으로 "독도를 칭하여 말하기를 일본 속지라 한 것은 심히 아연실색할 일이다."라고 한 대한 제국의 지령문을 인용하면서 항의하였습니다. 황성신문 또한 일제의 독도 침탈에 대한 기사를 실어 항의를 표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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