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y

일제의 침략과 식민통치

by ㎣㎤㎥㎦ 2022. 10. 17.
반응형

1910년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식민지 지배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총독은 일본 천황에게 직속된 조선 내 최고의 권력자로 육, 해군 현역 대장 중에서 임명하였으며, 입법, 사법, 행정은 물론 군사에 관해서도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총독부의 주요 관리는 일본인이었고, 총독의 자문 기구로 중추원을 두었으나 실질적인 기능은 행사하지 못하였으며,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 및 참여는 철저히 배제되었습니다.

 1910년대에 일제는 헌병 경찰제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습니다. 헌병 경찰들은 의병 학살과 독립 운동가 체포는 물론 호적 사무, 세금 징수, 일본어 보급 등 각종 행정 업무까지 수행하였습니다.

일제는 행정 관리 뿐 아니라 교원들까지 제복을 입히고 칼을 차게 하여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습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여 한국인이 발간하던 신문을 모두 폐간하였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출판물의 발행을 금지하였습니다. 정치 단체뿐 아니라 각종 학회도 해산하는 등 독립운동을 탄압하였습니다.

 3.1 운동으로 무단 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제는 통치 방식을 이른바 '문화 통치'로 전환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일제의 무단 통치에 대해 악화된 국제 여론도 작용하였습니다. 1919년에 취임한 사이트 총독은 조선인의 문화 창달과 민력 증진을 내세우며 문관도 총독에 임용될 수 있도록 하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습니다. 관리나 교원의 제복 착용을 폐지하였으며 , 한국인에게만 적용되던 태형을 폐지하였습니다. 또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였습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창간되고, 한글 잡지가 발간되었으며, 각종 사회단체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문관 총독은 단 한명도 임명되지 않았고, 헌병 경찰을 보통 경찰로 바꿨을 뿐 경찰관서와 경찰 인원수는 3.1 운동 이전보다 오히려 3배 이상 늘었습니다. 치안 유지법을 만들어 한국인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신문도 사전 검열을 통해 기사 삭제, 압수, 정간 등의 방법으로 탄압하였습니다. 

 한편, 일제는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도에는 도 평의회, 부와 면에는 협의회를 설치하여 친일 인사들을 임명하거나 선출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이 일제에 협력하였고, 민족 지도자들 중에서도 한국인의 자치권과 참정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이처럼 문화 통치는 우리 민족을 기만하고 분열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가혹한 식민 통치를 대외적으로 은폐하고 국제 여론의 악화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제는 1912년에 토지 조사령을 공포하고 전국적인 토지 조사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조선 총독부는 이 사업이 지세를 공정하게 하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된 목적은 지세를 안정적으로 확보함으로써 식민지 경제 기반을 구축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토지 조사 사업은 토지 소유자가 조선 총독이 정한 기간 내에 자신의 소유지를 신고하면 토지 조사국에서 소유권, 토지 가격, 지형 등을 조사 및 측량하여 토지 대장과 지도를 작성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18년 마무리된 이 사업으로 신고 기한을 넘기거나 소유권이 불분명한 토지는 조선 총독부의 소유가 되었으며,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일본인 농업 이주민에게 헐값으로 넘겨졌습니다. 

 토지 조사 사업으로 농민들이 가지고 있던 관습상 경작권은 부정되고 소유권만 인정되었습니다. 따라서 지주의 권한은 더욱 강화되었으나, 많은 농민들이 기한부 계약에 의해 소작농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이들은 도시의 토막민이나 화전민이 되었으며, 만주나 연해주 등 해외로 이주하기도 하였습니다.

 일제는 식민지 결제 수탈 체제 구축을 위해 토지 외에도 우리나라 산업 전반을 장악하였습니다. 1910년에는 회사령을 공포하여 회사를 설립할때 반드시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게 하였으며, 허가 조건을 위반하였을 경우 총독이 회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게 함으로써 민족 기업의 성장을 억제하였습니다. 

 일제의 어업령을 제정하여 일본인을 중심으로 어장을 재편성하였습니다. 삼림령과 임야 조사령을 내려 소유가 불분명한 상당수의 공유림과 국유림을 조선 총독부가 소유하였으며, 일반인들의 산림 이용권이 제한되었습니다. 

 또한 조선 광업령을 제정하여 광업권에 대한 허가제를 실시하였는데,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광산물 수요가 급증하자, 일본 재벌들이 주요 광산을 대부분 독점하였습니다. 한편, 조선 총독부는 1910년 대에 인삼, 소금, 담배 등을 전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일본은 제 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산업 자본이 급속하게 성장하였습니다. 많은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습니다. 농사짓는 인구가 줄어든 데다가 상인들의 매점매석으로 쌀 가격이 폭등하면서 일본에서는 1918년 쌀 소동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일제는 식량의 안정된 공급을 위해 1920년부터 조선에서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였습니다. 

 산미 증식 계획은 관개 시설의 개선, 개간과 간척에 의한 농지 확대, 품종 개량, 퇴비 장려 등을 통해 수확량을 늘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쌀 생산량은 크게 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증산량보다 훨씬 많은 쌀을 일본으로 수탈해 갔습니다. 쌀 반출로 지주의 경제력은 더욱 커졌으나, 농민들의 처지는 어려웠습니다. 1인당 쌀 소비량은 줄어들었으며, 만주에서 조, 수수 등 잡곡을 수입하여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토지를 빌린 농민들은 높은 소작료 외에도 수리 조합비, 곡물 운반비까지 부담하게 되면서 고통이 가중되었습니다. 

반응형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족 실력 양성 운동  (0) 2022.10.24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0) 2022.10.20
제 1,2차 세계 대전 사이의 국제 정세  (0) 2022.10.17
독도와 간도  (0) 2022.10.10
개항 이후 경제 및 사회의 변화  (0) 2022.10.0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