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양반 집권층은 중앙과 지방에서 붕당 정치와 향약을 통해 지배 신분으로서의 특권을 계속 유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가치 규범인 성리학의 명분론을 강화하고 절대화하여 동요하는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회 변화의 움직임을 외면하고 사회 모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17세기 후반 윤휴와 박세당은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유교 경전에 대해 기존 주자의 학문 체계와 다른 해석을 내렸습니다. 이로 따라 사문난적으로 몰려 학계에서 배척당하였습니다.
성리학에 대한 비판은 더 나아가 양명학의 수용으로 나타났습니다. 양명학은 지행합일의 실천성을 강조하여 진정한 앎은 곧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주로 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재야 소론 계열의 학자들에 의해 명맥을 이어 갔습니다. 18세기 초 정제두는 양명학을 계승하여 강화 학파를 형성하였습니다.
양 난 이후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화하자 가는 과정에서 성리학은 합리적인 수습책을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조선 후기에 농업과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나타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대두한 사회 개혁론이 바로 실학이었습니다. 실학은 성리학과는 다른 새로운 학문 체계로 성리학의 폐단과 조선 후기 사회의 각종 부조리를 개혁하려는 현실 개혁 사상이었습니다. 18세기를 전후하여 재야의 지식인들에 의해 활발하게 연구되었습니다.
조선의 실학자들은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비판적이고 실증적인 논리로 여러 개혁론을 제시하였습니다.
조선 후기 농민의 경제적 어려움이 심화하자 토지에서 이탈하는 농민이 많아졌습니다.
이에 농민들의 어려움과 처지를 직접 목격하여 농촌의 현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실학자들은 농민의 처지를 개선할 각종 제도 개혁의 방안을 제기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농업을 중시한 반면 상공업은 경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사회, 경제 체제의 큰 변화 속에서 학자들의 경제관도 바뀌었고, 토지 개혁과 함께 상공업 진흥 및 기술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가 등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주로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대내외 무역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룰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적 움직임은 국학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들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성리학자들은 우리 문화가 유교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실학자들은 보다 더 민족의 전통과 현실의 당면한 문제에 관심이 컸습니다. 이에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의 역사, 지리, 언어를 정리하고 연구하는 국학이 발달하였습니다.
세도 정치로 인해 정치 기강은 해이해지고 탐관오리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농민들에게 횡포를 일삼으면서 19세기 농촌 사회는 피폐해졌습니다. 삼정이 문란해져 농민들은 더욱 궁핍해졌고, 가난한 농민들은 세금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고향을 떠나 산간벽지로 들어가 도적이나 화전민, 광산 노동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1820년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가 창궐하여 수년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는 상황에서 백성 사이에 비기와 도참설이 널리 퍼졌고, 서양의 이양선까지 해안에 출몰하면서 민심을 극도로 흉흉해졌습니다. 각 지역에서는 도적이 크게 일어나 지방의 토호나 부상을 공격하는 등 사회 불안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이러한 사회 불안 속에서 농민의 사회의식은 점차 높아져 곳곳에서 적극적인 저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어려운 생활 속에 허덕이던 농민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하였던 것은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정신적인 위안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예언 사상, 천주교, 동학 등 새로운 종교가 유행하였습니다.
18세기 후반 학문적인 호기심에서 연구되어 온 서학이 민간 사회에서 신앙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모든 인간은 천주 앞에서 평등하며, 내세에서의 영생을 약속하는 서학의 교리는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관심을 받으면서 점차 교세가 확장되었습니다. 천주교의 평등사상과 내세 신앙은 차별대우와 비참한 현실에 실망하고 있었던 조선 백성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서학은 성리학적 성분 질서에 기초한 조선 사회의 근간을 손상시킬 위협 요소로 여겨졌고, 결국 사학, 사교로 규정당해 극심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유교는 변화하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고, 불교 역시 새로운 사회를 주도할 역량이 부족하였습니다. 서학이 보수적인 인습에 젖어 있는 백성에게는 친근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서양 세력의 침투에 대한 두려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통받는 농민들의 어려운 현실, 서양 세력의 접근으로 불안감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양반인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였습니다.
동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기본 사상을 바탕으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민중들에게 크게 호응을 받게 되자, 정부는 동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는 명목으로 최제우를 처형하였습니다.
이후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펴내어 교리를 정하고 교세를 확장해나갔습니다.
조선 후기에 나타난 천주교와 동학은 양반 중심의 사회를 타파하는 데 정신적인 이념으로 작용하였으며,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데 사상적, 실천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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