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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개혁의 내용과 의의

by ㎣㎤㎥㎦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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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국은 황제국에 맞는 체제를 수립하고자 하였습니다. 먼저 법규교정소라는 특별 입법 기구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한국 국제를 제정,반포하여 자주독립 국가임을 선포하고,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있는 전제 국가임을 천명하였습니다. 이처럼 대한 제국은 국권을 중시하였으나,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권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였습니다.

대한 제국은 강력한 황제권을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이룩하고자 군권을 막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주권의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그 근거를 만국 공법에서 얻었는데, 이는 대한 제국이 근대 주권 국가를 이루겠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한 제국은 국제를 근간으로 하여 1899년 청과 대등한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는 근대적 외교 관계의 수립을 의미하였습니다. 또한, 형법의 교정을 실시하였고, 이를 통해 1905년 형법대전을 반포하였습니다. 이는 근대법 체계가 수립되었음을 의미하였습니다.

대한국 국제 제정 이후 광무개혁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습니다. 궁내부를 확대하고 내장원을 강화하였으며, 군제 개편으로 최고군 통수부인 원수부를 설치하고, 중앙군인 친위대를 증강하고 시위대를 재조직하였습니다. 경제 정책으로 양전, 지계 사업을 실시하고 상공업을 육성하였습니다.

대한 제국은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양전을 실시하여 세금을 부과하고자 하였습니다. 1898년 정부는 양전 사업을 담당할 기관으로써 양지아문을 설치하고, 미국인 측량기사를 초빙하였습니다. 양전 사업은 1899년 전국의 각 군으로 실무진을 파견하면서부터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1901년 전국에 심한 흉년이 발생하여 그해 말에 중단되었습니다. 그동안 양전을 실시한 전역은 전국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24개 군에서 실시되었습니다.

이후 양전 사업은 러,일 전쟁 전후로 두 차례 더 실시되었습니다. 전국 토지의 약 3분의 2에 달하는 218군을 측량하여 조사하였습니다. 양전 사업을 통하여 소유권이 확인되면 소유주에게 근대적 토지 소유권인 지계를 발급해 주었습니다. 정부는 지계아문을 설치하여, 지계 발급 업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지아문과 지계아문은 효율적 업무 추진을 위해 지계아문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양전 사업의 특징은 국가가 토지 소유권을 공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토지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가 지계였습니다. 당시 무분별한 거래로 소유권 관련 분쟁이 빈번하였는데, 근대적 토지 소유권 증명서인 지계를 발급하여 분쟁 조정 비용과 경제적 거래 비용을 감소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계에 사용되는 용어 또한 사적 소유권을 분명히 하기 위한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즉, 토지 소유자와 소작농에 대해 시주와 시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시주는 토지 소유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시작은 소작농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사실상의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계의 발행으로 토지 소유권이 법적으로 인정되면서 지주제가 강화되었습니다. 토지를 측량하는 과정에서는 농민의 토지가 궁방전에 혼입되는 경우가 생겨 농민과 황실 간의 토지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양전 사업은 토지 개혁보다 단순히 토지 거래 질서의 확립이라는 성격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사업을 운영할 재정의 부족과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압력으로 사업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19세기 후기 대부분의 국가들은 근대화의 기반인 상공업을 육성하였습니다. 국가적 역량의 동원을 통해 근대 국가의 재정 기반을 확립하는 것이 국가 정책의 주요 목적이었습니다.

대한 제국은 1898년 백성을 편안히 하고 국가에 도움이 될 방법을 실행한다는 내용의 식산 흥업 조칙을 내렸습니다. 이후 대한 제국은 상공업 진흥책으로 상공업 종사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특히, 관민 공동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학교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근대적인 기술 학교로서 기예 학교, 상공 학교, 외국어 학교 등을 설립하였습니다. 우편 사무 요원의 양성을 위한 우무학당, 전무학당이 설립되었고, 의사 양성을 위해 의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정부는 상공업 진흥에 필요한 제반 시설의 확충에도 노력하였습니다. 통신, 교통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서울에 전화를 가설하고, 서북 철도국을 설치하여 경의 철도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서울을 근대적 도시로 변모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기술 교육 정책의 일환으로 해외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근대 산업 기술을 배워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인공 양잠 합자 회사, 직조 권업장 등 근대적 회사들이 설립되었고, 철도 , 운수부문에서도 근대적인 기술과 기계가 도입되었습니다.

대한 제국은 민간 회사의 설립도 지원하였습니다. 민간 주도의 식산 흥업 운동은 은행 및 각종 회사의 설립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1896년 최초의 민간 은행인 조선은행이 설립되었고, 이후 한성은행과 대한천일은행 등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회사들은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되는 경향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상공업 진흥책은 러, 일 전쟁 이후 타격을 입기 시작하여 정부 차원에서 실시된 정책은 중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민간의 식산흥업 활동은 계속되었는데, 개성의 종삼 회사, 평양의 자기 제조 회사, 군산의 호상관 상회 등이 대표적이었습니다.

광무개혁은 황제권을 중심으로 한 자주독립과 근대 국가 수립을 지향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각종 개혁 사업을 황제권을 바탕으로 추진하여 짧은 기간 동안 나름대로 발전과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각종 사업은 재정의 부족과 러, 일 전쟁이후 일본의 압력으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사업의 추진 세력이 황실과 일부 관료에게 국한되어 있었고, 개혁의 내용 또한 백성들의 열망을 온전하게 담아내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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