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y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

by ㎣㎤㎥㎦ 2022. 10. 4.
반응형

청일 전쟁 이후 중앙 관료들은 친일 성향과 친미 성향의 개화파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친미 세력은 국민 계몽을 위하여 신문을 발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미국에 망명 중이던 서재필이 귀국하여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발간하였습니다. 독립신문은 조선이 자주 독립국이라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신문을 두 가지로 발행하였습니다. 국내의 일반 민중들을 위한 한글판과 대외적으로 자주독립을 알리기 위한 영문판으로 보급하였습니다.

이어 자주독립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로 독립문을 세우고자 하였고, 이를 세우기 위하여 독립 협회를 창건하였습니다. 지식인들과 정부 내의 개혁적 성향의 관료들을 중심으로 조직하여, 초대 회장은 안경수, 위원장은 이완용이 되었습니다. 서재필은 다시 미국인으로 귀화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고문 자격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독립문 건립을 위한 후원금을 내면 독립 협회 회칙에 따라 누구나 독립 협회의 회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때 후원금에는 왕실 인사와 고위 관료 외에 직업을 알 수 없는 많은 국민 등 다양한 계층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이들에게 독립 협회의 회원 자격이 주어지면서 국민적 단체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독립 협회의 활동은 크게 자주독립, 자유민권, 자강 혁신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자주독립을 위한 대표적인 활동은 바로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에 대한 저항 활동이었습니다. 외세 배척 운동의 주된 대상은 러시아와 프랑스였습니다.

독립 협회는 러시아가 석탄 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부산 절영도를 조차하려고 하자 이를 저지하였습니다. 러시아가 설립한 한, 러 은행동 철수시켰으며 프랑스와 독일의 광산 채굴권 요구를 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독립 협회는 그 밖의 열강에는 우호적이었으며, 열강등과 교류를 통하여 나라를 발전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자유 민권 활동으로 개인의 생존권 및 언론과 집회의 자유권과 국민 참정권, 평등권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서구식 의회 설치를 제의하였습니다.

자강 혁신 활동은 보수파 내각을 퇴진시키고 개혁 내각을 수립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고 헌의 6조를 결의하여 황제의 재가를 받았으나, 보수 세력이 반발하여 정책으로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독립 협회는 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기 위하여 박정양 내각과 협상을 통해 중추원 관제를 개정하였습니다.

독립 협회는 19세기 말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던 시기에 설립되어 근대화 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는 일제의 주권 침탈과 식민 통치 과정에서 항일 독립운동과 국민 국가 수립 운동 등의 내적 추진력이 되었습니다.

독립 협회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보수파와의 대립이 심화하였습니다. 당시 독립 협회는 박정양 내각과 공조하면서 중추원 관제를 개편하려고 하였고 이후에도 내각과 협조하면서 내정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보수 세력과 일본은 독립 협회가 황제를 폐위하고 공화국을 세우려고 한다는 거짓 보고를 고종에게 올렸습니다. 한편, 일본도 대한 제국의 성장을 막기 위해서 독립 협회의 지도부에 있는 친일 인사를 사주하여 반정부 투쟁을 벌이도록 하였습니다.

이처럼 거짓된 황제 폐위 보고와 반정부 투쟁이 벌어지자, 고종은 독립 협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추원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황제권을 견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고종은 황제권을 지키기 위해 이상재를 비롯한 독립 협회 간부 17명을 구속하고, 독립 협회의 해체를 명령하였습니다. 또한, 개혁 성향의 내각을 정리하고, 조병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을 등용하였습니다.

독립 협회의 간부 구속과 해산에 놀란 회원들과 일부 서울 시민들은 경무청 앞과 종로에서 만민 공동회를 계속 열면서 정보의 조치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위기에 몰린 고종은 보부상 단체인 황국 협회와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 협회를 강제로 해산하였습니다.

아관 파천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졌습니다. 러시아는 조선의 자원과 이권을 일탈하기 시작하여 경성, 경원의 채굴권, 압록강, 두만강, 울릉도 등지의 채벌권을 요구하는 등 각종 이권을 차지하였습니다.

한편, 삼국 간섭으로 인해 서로 긴장 관계에 있던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도 차츰 원만해져 갔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은 1896년 5월 베베르,고무라 각서를 통해 양국의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같은 해에 실시된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을 계기로 러,일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습니다. 이후 러시아와 일본은 로마노프, 야마가타 협정을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양국의 권리가 동등함을 약속하였습니다.

한편, 러시아와 청은 러, 청 비밀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를 통해 청은 러시아에 지린 성과 헤이룽장 성을 통과하는 동청 철도의 부설권을 허가하였습니다. 따라서 러시아는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서 가급적 일본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조선은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재정, 군사적 원조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대하였던 차관과 원조를 얻을 수 없었고,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력은 급속히 강해졌습니다. 이러한 대내외적 상황을 인식한 고종은 더 이상 러시아가 자신과 조선을 보호해주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따라서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습니다. 국내에서는 갑오개혁과 아관 파천 등으로 실추된 국왕의 위상을 높이고, 자주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형성되었습니다. 독립 협회를 비롯하여 조정의 관료들은 고종의 환궁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마침내 1897년 고종은 서양 각국의 공사관이 밀집해 있는 서울 정동과 가까운 경운궁으로 환궁하였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