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청은 1876년 강화도 조약과 1882년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의 체결을 통하여 각각 조선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심각한 경제적 문제는 쌀 수출과 외국산 면제품의 수입이었습니다. 일본과 청은 값싼 영국산 면제품을 수입해 조선으로 비싼 값에 수출하였습니다.당시 일본은 자국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에서 쌀을 수입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조선과의 무역에서 많은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쌀을 조선에서 값싸게 수입할 수 있었습니다.반면 조선에서는 쌀의 대량 유출로 인해 쌀값이 폭등하게 되었습니다. 대지주들은 쌀값 상승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되자, 대토지 소유에 대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이에 따라 지주제가 더욱 강화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쌀값이 상승하면서 토지를 가진 농민은 이익을 얻었지만 토지를 못 가진 농민은 쌀을 구매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일부 지방관들은 방곡령을 내렸지만 일본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이처럼 조선의 대외 무역 체계에서 모순된 상황이 계속 발생하자, 국내 경제와 사회 문제도 동시에 심화하였습니다. 특히, 곡창 지대였던 호남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더 큰 피해를 입고 있었습니다. 동학은 1880년대에 이르러 교세가 커졌습니다,삼례 집회와 복합 상소 등을 통해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동학교도는 보은 집회를 개최하여 교조 신원 회복과 함께 서양과 일본은 적대시하는 ‘척왜양 창의’를 경의 하였습니다(1893). 이에 조정은 급하게 어윤중을 보내 회유하여 보은 집회는 해산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전봉준, 서인주, 서병학 등이 금구 집회를 열었습니다. 금구 집회는 동학의 이전 집회에 비해 정치적 색채가 강하였으나, 보은 집회가 해산되자 곧이어 해산하였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의 불만은 여전한 지배층의 압제로 인해 점점 고조되어 갔습니다. 특히,고부는 전운사와 균전사의 횡포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여기에 고부 군수 조병갑의 폭정이 더해지자 전봉준은 사발통문을 돌려 세력을 규합한 후 봉기를 일으켰습니다.정부는 고부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새로운 군수를 임명하여 농민 봉기를 진정시켰습니다.그러나 봉기의 원인을 조사하러 내려온 안핵사 이용태가 농민 봉기 관련자들을 탄압하였습니다. 이에 전봉준은 손화중이 있는 무장으로 몸을 피했고, 그곳에서 다시 봉기하였습니다.이후 동학 농민군은 4대 강령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무력 항쟁에 나서 마침내 전주까지 점령하였습니다. 당황한 정부는 청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청은 톈진 조약에 따라 일본에 이를 알렸습니다. 일본 역시 군대를 파병하자, 정부는 일본의 개입으로 인한 혼란을 우려하여 동학 농민군과의 협상을 모색하였습니다. 동학 농민군 역시 장기전으로 갈수록 전투가 불리해지자 정부군에 휴전을 제외하였습니다. 이에 동학 농민군은 안전 보장과 폐정 개혁을 조건으로 전주화약을 맺고 철수하였습니다.조정은 전주 화약을 내세워 청과 일본에게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철병을 거부하고 경복궁을 점령한 후 청,일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동학교도는 재봉기하고자 하였으나 농번기로 인해 즉각적인 행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1894년 9월에 접어들면서 전봉준은 다시 봉기하였습니다. 1차 봉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북접의 최시형도 봉기 참여를 결정하였습니다. 이후 동학 농민군 지도자들은 남접과 북접의 연합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손병희의 북접 농민군은 논산에서 전봉준 부대와 합류하여 일본군에 저항하였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정규군으로서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동학 농민군의 전력은 미비하여 전세가 불리하였습니다. 또한, 동학 농민군은 사족중심으로 결성된 민보군의 저항을 과소평가하였습니다. 이것도 결과적으로 전세를 더욱 불리하게 만드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동학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를 계기로 패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봉준은 패전이 거듭되자 희생을 줄이기 위해 부대를 해산하였습니다. 동학 농민군의 다른 지도자들도 부대를 해산하였습니다. 이후 전봉준, 손화중 등은 모두 생포되어 처형되었으나 동학 농민군의 전투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은 장흥 석대들 전투, 금산 대둔산 전투등에서 모두 패배하였습니다. 결국 동학 농민 운동은 봉기 1년만에 실패로 끝났습니다.동학 농민군은 전주성 철군 이후에도 계속 전주 화약의 조건들이 이행되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전봉준과 전라 감사 김학진은 사태를 수습하고자 집강소 안을 도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전봉준과 김학진은 협상 과정에서 관민이 서로 화합한다는 원칙에 합의하였고, 이에 따라 집강소가 설립되었습니다.집강소의 기본적인 성격은 치안을 담당하는 것으로, 전라도의 고을 관아에 설치되었습니다. 여기에 집강소를 담당하는 대도소를 전주와 남원에 설치하였고, 대도소 밑에는 도소를 두어 폐정 개혁 활동을 실시하였습니다.당시 전주의 대도소는 전봉준이, 남원의 대도소는 김개남이 담당하여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개혁안은 주로 세금 및 토지 등 제도 개혁과 탐관오리 처벌 등의 사회 개혁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대 국민 국가 건설에 필요한 국가 조직 및 행정과 관련된 국방, 재정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한편, 전라도 모든 지역의 관리들이 동학 농민군의 명령대로 움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자 동학 농민군은 이를 무력으로 해결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지주나 사족들은 더욱 동학 농민군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또한 전봉준은 1차 봉기 이후 내놓은 개혁 요구안에서 흥선 대원군의 정계 복귀를 요구하였습니다. 그것은 흥선 대원군이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학 농민군은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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