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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1) 조선 전기부터 16세기 초반까지 전세 방식은 농토의 비옥도와 그해 풍흉에 따라 부세를 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방법은 매우 복잡하였고 농민들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정은 15세기 말부터 풍흉과 관계없이 1결당 4~6두를 징수하였습니다. 그리고 16세기 이후로는 세액이 최저율로 적용되었습니다. 이후 조정은 1635년부터 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미곡 4~6두씩 전세를 납부하는 영정법을 실시하였습니다. 조선 전기 농민들의 조세 부담 중에서 지역의 특산물을 납입하는 공납이 가장 무거웠습니다. 특히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특산품까지 부과되면서 농민들을 더욱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방납을 시행하였으나 오히려 농민들의 부담을 더욱 가중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이와 유성룡은 특산물 대신 가호를 기.. 2022. 8. 4.
조선전기 조선 시대에는 신분을 법적으로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하는 양천 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양인은 국가의 지배만을 받는 자유민이었습니다. 조세와 국역 등의 의무를 지녔습니다. 천인은 관청이나 양반에게 소속된 비자유민으로써 원칙적으로 관직에 나갈 수 없었으며 국역이 면제되었습니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문벌, 관직, 토지 등을 차지한 특권적인 지배 신분층이 생겼습니다. 양인 내에서도 양반, 중인, 상민으로 분화되었습니다. 지배층 내에서도 다시 양반과 중인으로 나뉘었습니다. 양반은 경제적으로는 지주였고, 정치적으로는 관료 또는 관료 예비군으로 조선 사회를 지배한 신분이었습니다. 이들은 현직 또는 예비 관료로 활동하며 유학적 소양과 자질을 키우는 독서 활동에 몰두하였습니다. 또한, 최고의 지배층으로 각종 국역을 면.. 2022. 8. 4.
조선의 건국 14세기 이후 원은 왕위 계승의 불안정과 재정 운용의 실패로 국력이 약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라마교 행사 등으로 교초를 남발함으로써 물가가 상승하였고, 1351년의 대홍수로 황허강이 범람하여 농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중원 일대에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세력을 떨쳤으나, 원의 군대에서 쫓겨 만주로 진출하였고,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였습니다. 홍건적의 제2차 침입 때 개경이 함락되었는데, 이때 이성계가 사병 2,000명을 이끌고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습니다. 결국, 고려를 침공한 홍건적은 전멸하였고, 중국 강남에 남아 세력을 키운 주원장은 명을 건국하였습니다. 주원장이 원의 수도인 대도를 점령하고 천하를 평정하자, 원 순제는 중원을 포기하고 북방으로 도피하였는데, 이때.. 2022. 7. 21.
고려의 건국 신라 말기에는 중앙 귀족들의 왕위 다툼과 지방 호족의 등장, 각지의 농민 봉기 등으로 말미암아 정부의 직접적인 지배력이 경주 일대밖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배경으로 견훤이 완산주에 후백제를 세웠다. 궁예는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이후 국호를 태봉으로 고쳤다. 궁예가 세력을 넓히고 있을 무렵, 송악 지방에서는 왕건의 집안이 예성강 유역의 군진 세력과 연합하여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다. 그 후 궁예의 세력이 송악에 미치게 되자 왕건은 궁예에게 귀순하여 그의 부하가 되었다.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금성,진도 등 후백제의 배후 지역을 점령하여 후백제가 중국 및 일본으로 통하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공로에 힘입어 왕건은 시중의 자리까지 오르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한.. 2022. 7. 21.